가까운친구,먼친구
가까운 친구, 먼 친구
어린 시절, 나는 친구가 좋아 도시락을 세 개씩 싸가곤 했다.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어려운 친구를 그 시절 국민학교(4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도시락 봉사를 했다.
비교적 풍족하게 살 때라서 어머니의 사랑으로 그리 지낸 친구가 있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친구는 좋은 중학교에 합격했다. 이른바, 일류 중학교(보성 중학교)에 합격이 되었는데, 그 당시 학비가 없어서 학업을 중단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그 친구의 중학교 학비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 납부해 주셨다. 그 친구는 중학교를 마치고, 5명의 동생 생계를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나의 아버지를 통해 직장을 마련해 주었고, 그 친구는 열심히 직장생활을 했을 것이다. 공부 잘하고 책임감 강하며 그림을 잘 그리던 친구였다. 같이 공부보다는 만화를 그리며 재미있게 지냈던 기억이 새롭다.
크게 사업하던 부친께서 무리한 확장으로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그 큰 사업을 접었을 무렵이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을 진학하면서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며, 중학생들 과외 수업 선생님까지 하느라 정신없었다. 그 친구에 대한 소식은 대학 입학한 후에 끊어졌다. 이름은 김도원인데... 세월이 흐르니 그 친구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의 공부가 상위권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 학급 반장을 매년 거치며 총학생회장까지 나서면서, 나의 출신 고등학교에서는 유명세를 탔다. 출신 고등학교에는 수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형제 결의를 맺은 친구들도 수두룩했다. 학교가 끝나면 체육관으로, 집으로, 친구들을 수 십명씩 몰고 다녔으니까... 그래도 대학은 가야 한다고 생각해 운동도 열심히 병행하면서 사범대학 체육 교육학을 전공하며 무탈한 청소년기를 지냈다.
세월이 흘러, 전시전람회 사업을 하며 잦은 해외 출장을 하는
사회생활을 했다. 홍콩 출장 때, 홍콩 수입상품 박람회 장내, 한국 국가관에서 홍콩인들과 상담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한참 쳐다본다는 느낌이 있었다. 상담 종료 후에 보니, 그리 가깝지도 않던 친구로 그저 같은 고등학교 출신에 동급생인 다른 반에서 공부하던 친구... 물론, 이름도 모르고, 동창생이라고 해야 할지, 친구라고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그런 친구인데, 고등학교 졸업 후 십수년 만인데도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홍콩 구석구석을 안내하고, 중국 수입상도 소개해 주며 내가 큰 도움을 받았다. 동창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 친구는 먼 친구였는데, 십수년 후에는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러면서 세월이 흐르고 또 다른 출장으로 독일로, 이태리로, 영국으로... 1년에 반을 해외 생활을 하다가 10년 후에는 미국 LA에서 같은 고등학교의 다른 동창생을 만났다.
지금이야 너도나도 해외여행이 자유스럽지만 적어도 그때는 해외가 평생 한 번 나가기도 어렵던 시절이라, 학교 동창을 해외에서 이렇게 마주친다는 것은 요즘엔 일도 아니다.
미국 LA에서 만난 고등학교 동창은 일반 학생이 아니고, 그 친구는 출신 고등학교의 유명한 축구선수였다. 3년 내내 교실에서는 볼 수 없고, 고교축구 대항전이 있을 때 서울 운동장이나 효창 운동장에서나 보던 운동하는 친구다. 이 친구는 LA국제 박람회에 한국관이 있다는 걸 알고 혹시나 하고 둘러보러 왔다고 했다. 그 친구는 내가 고등학교 학생회장을 출마하고 학교 교지에다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 무역업을 하며 해외여행을 많이 하겠다고 했던 그때를 기억하고 있던 친구였다. 이 친구 또한 가까운 친구는 아니고, 먼 친구였을 터...
이렇게 몇 차례씩 해외에서 친구들을 마주친 것은 그래도 내가 학창 시절 학생회 활동과 학급 반장을 했던 덕일 것이다.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을 한 나의 성격 덕분에 사회생활에 큰 도움을 받았다.
그 후, 시카고 하드웨어 박람회장에서 대학 친구를 마주친 적도 있는데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 친구는 가까운 친구였다.
30년 만에 시카고에서 만난 그 친구는 운영하던 슈퍼마켓을 5일간 문을 닫아 버리고, 간호사였던 부인도 함께 5일 휴가를 내주었다. 박람회 회기 중, 호텔에 있던 내 짐을 빼다 자기네 APT로 옮기고, 그 친구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몇십년 쌓여있던 이야기꽃도 피우며, 미시간 호수에서 밤새 바베큐 파티를 하던 그때가 그립다.